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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협영화집단 곡사의 '고갈'_트레일러 공개



<<<*고갈_트레일러_보기*>>>

비타협영화집단 곡사의 2009년 최신작 '고갈'(감독: 김곡)의 트레일러가 공개 되었습니다.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에 빛나는? 뷰티풀 호러? '고갈'이 곧 개봉할 예정이랍니다. 관심있으신 분은 검색해 보시길.

PS_언더프로젝트 오에서 곡사의 '자살변주'와 '정당정치의 역습'을 감상 할 수 있습니다, 이 중 자살변주'는 최종본이 아닌 무성 버전으로 감독의 요청에도 불구 하고 강렬한 유성 버전으로의 교체가 지연되고 있습니다. 이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빠른시일 내에 교체 하겠습니다.

자살변주
http://www.undergroundartchannel.net/zb/view.php?id=vol2_proj_o&page=1&sn1=&divpage=1&category=32&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85

정당정치의 역습
http://www.undergroundartchannel.net/zb/view.php?id=vol2_proj_o&page=1&sn1=&divpage=1&category=32&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72




다음은 <필름에 관한 짧은 사랑> 18호에 실린, 최병덕 기자와 김곡 감독의 인터뷰입니다.

1. 영화 <고갈>은 수평선 위에 공장이 늘어선 광할한 갯벌 위에서 남녀가 장난치는 장면이 지독할정도로 인상적입니다. 감독님께서는 이 샷을 <고갈>의 마스터이미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마스터이미지가 감독님의 관심을 끌었던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이것과 관련해서 영화 <고갈>의 시나리오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동기도 궁금합니다.

- 생성의 이미지는 소멸의 이미지에 의해서 균형잡혀야 한다. 소멸이 불가능했다면 생성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단지 뇌세포가 매순간 죽어간다는 의미에서 소멸이 삶을 구성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뇌세포의 생물학적 소멸 없이도, 우리의 신체와 정신은 매순간 소멸을 관통한다. 이것은 마치 필름스트립의 구조와도 같다. 필름스트립은 빛을 투영하거나 반사하는 프레임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들의 사이영역(흔히 말하는 스플라이싱 영역)으로도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이 정지인 프레임들을 비로소 운동으로 이끄는 것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문턱들을 통해서이다. 즉 정지 프레임들은 어둠을 통과해서만이 운동을 획득한다. 소멸을 대가로 지불해야 생성을 얻는 셈(반대로 소멸 없이, ‘순수 창조’를 말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되려 조악한 ‘창조 낭만주의’로 돌아가게 된다).

이렇게, 소멸은 경험을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경험될 수 없는 것 같다(마치 우리 내장이 지각을 구성하기에, 지각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소멸 자체는 경험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끝내 소멸 자체의 경험이 <고갈>의 목표였겠지만), 소멸의 여러 가지 파생태들은 먼저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숭고함......숭고함이란 개념에는 이미 소멸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 불가항력적이거나 인식불가능한 것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무력하거나 한없이 작아진다. 초한기수 앞에 선 어떤 수도 미분소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 사실 벌판 위에 서있는 공장들이나 그 굴뚝들은, 벌판의 배경이 아니다. 그 벌판을 황폐하게 하고, 벌판을 초토화, 사막화시킨 것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벌판의 광대함 만큼 숭고한 과거의 핵폭탄들이다. 벌판이 아무 것도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굴뚝이 그 망각을 짊어지웠기 때문이다(“기억이 잘 안나는데, 우리 엄마가 날 낳았댄다”). 숭고는 기본적으로 무한에 대한 무이다.

그러나 숭고함은 상대적인 느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소멸에 대한 절대적인 느낌이 있다. 굴뚝이나 공장들에 ‘나’ 앞에 있을 수도 있지만, 정확히 ‘너’가 될 수도 있다. 다가갈 수 없고, 다가가기 위해선 나의 기억 전체를 지불해야만 하는 굴뚝이 바로 너이다. 왜 <고갈>의 남자 여자들은 서로에게로 다가가지 못할까? 왜 남자가 여자에게, 반대로 여자가 남자에게 던진 진흙은 서로에게로 가닿지 못할까? 그들 간의 신호, 제스쳐, 언어가 그들 중간에서 소멸되기 때문이다. 혹은 가닿는 순간 소멸하기 때문이다. 소멸의 앰비언스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거나, 서로가 서로에게 소멸의 앰비언스이다(우린 유달리 거침 없는 연애를 할 때, 자주 이것을 느낀다).

<고갈>의 시나리오는, 무엇보다도 먼저 군산의 이미지를 그대로 전개한 것이다. 군산은 지금 한참 새만금 사업으로 소멸되고 있는 중이다.

고갈의 벌판, 언제라도 무너질 준비가 되어있는 대지, 무를 코팅한 일촉즉발의 유.  


2. 영화 <고갈>은 8mm로 촬영하고 HD로 최종 프린트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필름의 거친 입자들이 영화의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8mm로 촬영한 필름을 감독님이 수십 시간에 걸쳐 손수 현상했다는 것을 서독제 GV 때 직접 들었습니다. 필름이라는 매체를 직접 손으로 만져서 현상해내는 작업과정이, 결과로 보여지는 스크린 위에서의 이미지 이상으로 감독님께 의미가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영화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필름 자체의 변주를 통해서 영화 자체를 사유하고 있다고 말하면 거창할까요. 이 작업공정을 통해서 감독님이 필름매체에 대해서 느낀 바를 자유롭게 이야기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곡사는, 일부 멍청한 실험영화 비평가들이 오도해왔던 것처럼, 매체에 대한 반성주의자들은 아니다. 사실 영화는 어떤 경우에도 매체를 반성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영화가 자신의 매체를 반성하는 거울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 영화는 시선을 반사시킬 만큼 단단해야 하며, 둘째, 그렇게 되돌아오는 시선을 수용할 만큼 관객은 고정적이어야 하는데, 영화는 그만큼 단단한 적도, 반대로 관객이 그만큼 고정점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는 흐르거나 증발되기 십상이며, 관객은 고정점이라기보다는 시선의 소실점이 되기 십상이다.

우리가 <고갈>을 8mm로 택한 것은 결코 영화 자체를 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영화가 언제나 롤러코스터와 같은 인식론적 위상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롤러코스터를 탈 때, 롤러코스터가 기계라는 이유만으로, 인간은 “이것은 롤러코스터”라고 반성하지 않는다. 롤러코스터는, 그에 탄 인간들처럼 주체도 아니지만, 주체가 반성할 대상도 아니다. 롤러코스터는 그에 탄 인간들은 휘어잡으며, 그들을 넋을 빼놓는다(물론 ‘넋’이 무엇인가는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모든 영화는 롤러코스터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그것은 반성되지 않고, 순수하게 경험된다. 그리고 영화의 형식은 언제나 전자가 아니라 후자의 층위에서 작동한다. <고갈>에선 8mm 그레인이 그러했다.

<고갈>이 8mm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8mm가 <고갈>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8mm의 그레인들은 35mm의 그레인들에 비해서, 숭고한 희박성을 지닌다(그 물리적 용량차!). 우리가 500T의 고감도 필름을 선택한 것은 이를 보강하기 위해서였지, 결코 역으로 그를 보상하기 위해서였던 것은 아니다. 8mm 필름은 35mm 사이즈로 확대되었을 때, 대상들로부터 빠져나가기는 커녕(이것이 대부분의 경우이다), 대상들을 채운다. 마치 언제든지 흩어지고, 그럼으로써 대상의 존재를 휘발시킬 수 있을 것처럼.

우린 8mm의 그레인들을, 앞서 언급했던 숭고하도록 불가항력적인 앰비언스, 숭고하도록 조밀한 앰비언스로 캐스팅했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 여자, 아름보다 더 큰 역할을 한, 진정한 <고갈>의 주연이다. 예컨대 남자가 냄새맡지 못하고, 여자가 그보다 더 민감한 것, 그 심연은 무엇인가? 그것은 수퍼 8mm 500T 그레인이다. 영화 속에서, 8mm의 그레인들은 부실기업에 잠깐 들어가있는, 언제든지 회수가능한 자본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이 발을 빼는 순간 그 기업은 붕괴되며, 이 때 IMF가 도래한다. 아름(배달원)이 그 IMF이다.

따라서 우리는 직접 현상을 하고, 손으로 필름을 만지는 행위가, 영화를 보는 행위와 독립적인, 어떤 상징적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손으로 현상하는 것, 손으로 그레인들을 주조하는 것은, 단지 영화를 다 본 후에 알려짐으로써 상징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영화를 보는 와중에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직접 현상을 하고, 그레인들을 만지는 것은, 안그래도 되는데, 영화 자체를 재현하기 위해 영화 속 제스쳐(남자, 여자, 아름의 몸짓들)에게 곡사가 덧붙인 상징적 행위가 아니다. 거꾸로 영화 속 제스쳐가 지나치게 순수하기 때문에 곡사도 그 그레인들을 만질 수 있었던 것이다. 몇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심지어 우린 곡사가 8mm 필름현상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고도, 이 소멸의 앰비언스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또, 더 나아가, 8mm가 아니었다면, <고갈>은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고갈>은 <고갈>답지 않았을 수 있다.

한마디만 더 해야겠다. 혹자들은 <고갈>에 있어서 8mm 화면이 과연 의도인가 아닌가 라며 묻는데, 그레인과 경험 간의 상관관계를 묻는 우회적이고 호의적인 질문이라면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작가의 사변에 대한 지성적 궁금증이라면, 그것은 정말 헛소리다. 장미란 선수가 목이 짧고 다리가 짧은 것이 과연, 그녀의 의도냐 라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 질문이기 때문이다. 역도 선수가 바벨을 들기 위해 자연스럽게 목이 짧아지고 다리가 짧아지는데, 그게 누구의 의도인가? 만약 그것이 여전히 의도라면, 차라리 그것은 신의 의도이다(그렇게 질문하는 자들은 여전히 해석하려고 하고, 상징을 찾아헤매며, 순수하게 경험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다). <고갈>도 마찬가지다. 소멸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입자화되고 희박화되는데, 그게 누구의 의도인가? 차라리 그것은 <고갈>의 의도이다. <고갈>은 <고갈>이기 위해서, 스스로 8mm를 요청했다.

3. 시각 뿐만이 아니라 이 영화가 주었던 충격은 사운드였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대상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기에 배경음악(?)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배경음악은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 무지화면에도 멈추질 않습니다. <고갈>에서 여자가 반복적으로 하던 행동인, 속에 것을 토해듯이 게워낼 때 그 속 안의 끓음 소리가 들린다면 이것과 닮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이 배경음악을 음악감독한테 주문할 때 어떤 얘기들을 했을지 궁금합니다.
(추가로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영화 엔딩부분에서 죽은 아이를 안고 갯벌에서 여자가 오열할 때 이 배경음악이 처음으로 모두 소거된 채 영화가 끝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의도도 궁금합니다.)

-<고갈>의 사운드 앰비언스는, 곡사와 오랫동안 작업을 해온, 홍철기의 솜씨다. 그는 최준용과 함께 아스트로 노이즈Astronoise라는 노이즈 밴드를 이끌고 있는 노이즈 뮤지션이기도 하다(<자살변주>와 같은 곡사와의 이전 공동작업에서처럼, 그는 <고갈>에게 턴테이블 등을 이용한 피드백 작업을 추천하였으며, 곡사는 이를 말리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한국과 같이 척박한 음악 현실에서 부당한 대접을 받는 대표적인 작가 중에 하나일텐데, 그 이유는 노이즈는 어떤 대상도 지시하지 않고, 어떤 기의도 연상시키지 않으며, 요컨대 어떻게든 재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가요는 연애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인기가 많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반재현성이야말로 <고갈>이 필요로 한 것이었다.

남자와 여자를, 그 내장으로부터 둘러싸는 앰비언스는, 전적으로 대상의 목소리가 아니라, 심연의 목소리여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포와 불안은 구분된다. 공포는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다. 사운드는 대상을 지시하지만, 앰비언스는 대상이 없으며, 오히려 대상을 만들고 해체시킨다. <고갈>에서, 남자가 잠깐 불안감을 느꼈던 것, 여자가 지속적으로 냄새를 맡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녀로 하여금 이곳을 떠나라고 종용했던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름(배달원)이 판촉하러 온 것, 그것은 공포의 사운드가 아니라 불안의 사운드이며, 사운드로 표현될 수도 있는 이미지가 아니라, 앰비언스로만 표현되는 이미지이다.

사실 앰비언스는 소리의 본질이다.

볼 수 있는 이미지는, 보는 주체와 대상을 상정하고, 그 시선의 방향성을 상정하지만, 소리 이미지는 뒤에서도 들릴 수 있고, 옆에서도 들릴 수 있으며, 심지어는 안보여도 들리며(유령의 목소리), 멀리서도 들린다(원거리 소음). 만약 이미지의 정의에 가장 어울리는 현상이 있다면, 그것은 시선보다는 듣는 행위에 가까울 것임은 이 때문이다.

결국 <고갈>의 또 다른 목표 중에 하나는, 모든 시각적 이미지의 청각화에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린 8mm 그레인을 보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을 들었다.

앰비언스는, 8mm 그레인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여자의 사타구니를 채우고, 그로부터 빠져나왔다. 아마도 여자가 자신의 불안을 끊임없이 재확인하고, 어떤 면에선 불안을 잠식시켜볼 요량으로, 자신의 몸 안쪽으로부터 무언가를 게워낼 때, 그녀의 대상은 이것이었으리라(우리는 소세지를, 결코 맛있게 먹지 않는, 차라리 의무적으로 강박적으로 먹는, 그녀의 표정을 인용할 수도 있다).

그녀는 음식물, 혹은 배설물을 게워낸 적이 없다. 그녀는 오직 홍철기의 피드백 앰비언스를, 8mm 그레인을, 말그대로 피드백했을 뿐이다.

그리고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한 이유는, 그 피드백이야말로 이 세계의 피드백이라는 것을 알았기, 아니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녀는, 피드백의 생장점이라 할 수 있는 유두를 절단함으로써, 그 피드백을 멈춰보려고 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피드백은 생장점 없이도 일어나며, 언제나 다른 생장점을 찾는다. 예를 들어, 유두가 잘린다고 자궁을 잘라낸 것은 아니며, -<고갈>의 후속편들에게서 더욱 분명히 연구될 터이지만-더 나아가본다면, 자궁을 자른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자궁 역할을 대체하는 다른 자궁들이 있다. 요컨대 이 소멸의 순환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곡사가 홍철기에게 주문했던 것은 장리우, 박지환, 오근영에게 주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권상준 촬영감독과 그의 8mm 핸드헬드에게 주문했던 것과 동일한 것이다.

시선을 스크린 뒤의 심연과 피드백시키고, 끝내 그 피드백 속으로 시선이 소멸되도록 하라.

4. <고갈>은 2시간이 넘는 장편입니다. 그동안에 중단편 위주로 작업했던 것을 비교했을 때(또한 공동작품이 아닌 개인작품이라는 점에서도), 남다른 경험이었을 것 같습니다. <고갈>을 단편이 아닌 장편으로 찍어야 했던 이유와 장편작업을 하면서 장편이 단편에 비해 갖는 매력이 있다면 어떤 점인지 <고갈>과 연관해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질문은 최근 독립영화들의 경향이 중단편에서 장편화되어 가고 있는데, 이것이 디지털이라는 기술적인 편리함과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는 길이를 가지고 있다는 점 외에 영화미학적으로 어떤 이유가 있을까 요즘 고민하는 부분들이 있어서 질문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장편과 단편 간의 차이는 단지 러닝 타임의 차이이다. 장편이 더 완결적이고 단편이 더 실험적이라는 일반적 견해는, 제도적 수용자의 입장에서만 성립하는 편견이다.

장편 영화보다 더 장황하고 통일적인 단편들이 무수히 많으며 단편 영화보다 더 집약적이고 산만한 장편들이 무수히 많다.

장편이 단편에 대해 갖는 매력은, 촬영 중간에 회식을 한다는 것뿐이다.


5. 남자-여자-아름, 그들은 누구인가?
- 남자는 지배자인가? 그러기엔 그는 너무나 어설프고 서투르다. 피지배자보다 적과 친구를 구분할 줄 모르는 지배자가 과연 지배자일까? 남자는 지배자의 실패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한 적이 없으며, 남자보다 적을 더 잘 안다는 의미에서 남자조차 지배한다. 박지환과 장리우가 촬영 내내 염두에 두었듯이, 여자는 남자의 풍경이다. 물론 역사 속에선 남자가 여자를 지배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수직적 단면, 역사의 종단면 안에선, 여자가 남자를 역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남자는 시선을 느끼지만 시선의 종단면은 느끼지 못한다. 반면, 여자가 시선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시선의 종단면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지배자 행세를 하는 사람들보다, 지배당하는 사람들이 운명이나 미래에 대해 더 잘 느끼지 않았던가(곡사는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신학적 임무라고 생각한다).

아름이는 바로 그 역사의 절단자, 시선의 절단자이다.

그녀는 사실 신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여자를 위해 접신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녀는 자본주의나 부르주아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접신을 위해 노동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산파이다. 사산아를 낳는 것은 전적으로 여자의 노동이며, 아름이는 그것을 축하할 뿐이기 때문이다. 아름이는 심연의 두께를 측정하던 굴뚝이 징후화했던 그것이다. 빛의 절단면 혹은 존재의 총체적 단면.

<고갈>이 역사성의 이미지를 취했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고갈>은, 아름과 함께, 역사성의 조건의 이미지를 취했으며, 역시 아름과 함께 역사의 절단면에 임하기 때문이다. <고갈>에 대해서 아름이의 위상과 역할을 빼놓고는 정치학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름이야말로, 역사의 종단면에서라면, 남자보다, 심지어는 여자보다 더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곡사가 하려고 했던 것은 결코 아름이가 역사 속에서 누구였냐고 묻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 누구란 요원하며, 단지 우리는 아름이가 역사의 단면을 어떻게 점하느냐 물을 뿐이다. <고갈>은 그에 대해서 아름이의 얼굴, 녹아내리는 아름이의 얼굴로 대답하였다. 아마도 그것은, 마그네슘으로 산화된 이멀젼처럼, 우리의 망막 뒤편으로부터 무너졌던, 내장붕괴의 감각일 것이다. 역사 안에서 상징들을 수집하기만 하는 자들, 억지춘향으로 역사를 쓰려고 하는 자들이 이에 대해서 무감각한 것은 당연하다. 소멸은 언제나 망막 뒤에서 일어나며, 사실 소멸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나 역사의 개념은 이렇게 빛을 투영하거나 반사하는 이멀젼의 개념을 필요로 한다. 인간이 대상에게 투영한 빛을 다시 회수할 수 있어야, 역사를 그 위에 기술할 것이 아닌가. 상징학자들의 사유는 여기까지만이다. 그들은 빛이 가닿는 순간, 그 이멀젼이 산호될 수 있음을, 용융될 수 있음을, 나아가 그 순간에서만큼은 인간이나 역사의 개념이 공멸할 수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이멀젼에 난 스크래치, 미세균열을 보는, 우리 징후학자들의 몫이다.

전자는 역사가 사건으로 이루어진다고 가정하는 반면, 후자는 역사는 사건의 공백들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느낀다.

아름이가 여자를 이긴 것일까? 여자는 패배했을까? 사실 여자는 아름이와 싸운 적도 없으며, 아름이도 여자와 경쟁한 적이 없다. 여자는 전적으로, 아름이가 이끌고 온, 이러한 이멀젼의 임계밀도와 투쟁한다.

여자의 사타구니로부터 울려퍼지던 앰비언스는 세계가 노광된 바 있는 이멀젼의 감도에 비례하며, 그 앰비언스의 파장은 질산염의 농도에 비례한다.

여자는 아름이를 본 적이 없다. 여자는 아름이를 듣는다. 그것은 자신의 내장으로부터, 사타구니로부터 들려온 목소리이다. 그녀가 사산아를 껴안은 것이 아니라, 거꾸로 사산아가 그녀를 껴안은 것이다. 그녀는 투쟁에서 패배하기는커녕 승리하였다. 앰비언스에 의해 둘러싸이기를 거부하고, 그 자신 스스로가 앰비언스가 되기를 결단함으로써. 스스로 음원이 될 때, 모든 외적인 사운드들이 오히려 멀리 들리며, 아예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은 명백하다.

사실 이는 <고갈>이 아니더라도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에게 모든 입자들은 희미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입자들이 우리에게 멀리 있어서가 아니라, 거꾸로, 그 입자들은 우리 안에 있는 식으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가깝기 때문이다. 슬픔과 안타까움은, 우리는 대부분 이것을 소멸이나 침강을 겪은 후에야 깨닫게 된다는 데에 있다.


[자료출처] http://blog.naver.com/goksa_film?Redirect=Log&logNo=10067316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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