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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21세기 버전 ‘신 (新) 고도를 기다리며’


                                                                               흑표범 퍼포먼스 ‘부름'(사진_최병현)


21세기 버전 ‘신 (新) 고도를 기다리며’
추락천사 페스티벌 오프닝 퍼포먼스 ‘부름’에 대한 상념들

박태린 (자유기고가)

중절모를 쓰고 긴 코트를 입은 노파 분장의 퍼포머가 기둥에 묶인 의자에 앉아 있다. 의자 앞 탁자에는 우유가 들어있는 잔과 밀가루를 담은 접시가 있다. 퍼포머 건너 편 다른 탁자에는 모니터가 있다. 암적 속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린다. 퍼포머는 스크린에 비춰진 전화를 받으러 달려가려고 하지만 입고 있는 옷이 기둥에 묶여 있어 갈 수가 없다.  


                

전화벨 소리가 계속 울리고 퍼포머는 입고 있는 옷을 벗기 시작한다.  퍼포머가 외투를 벗자 그 속에 다른 옷이 있다. 그 옷을 벗자  또 다른 옷이 있다. 하염없이 옷을 벗으려고 발버둥치는 퍼포머. 이 모든 옷들이 기둥에 연결돼 있어 자유롭지 못하다. 차분하던 퍼포머의 옷을 벗는 동작은 점점 거칠어진다. 비명을 지른다. 발버둥치는 동안 탁자가 쓰러지면서 탁자 위에 있던 우유가 쏟아지고 접시가 떨어지면서 밀가루가 바닥에 쏟아진다. 전화벨 소리는 끊임 없이 울린다. 퍼포머가 입고 있던 모든 옷을 벗고 전화를 받으려고 달려가자 그 전화를 누군가 받아 버린다. 이 때 다른 탁자위에 놓여있던 모니터에 퍼포머의 나체가 투영된다. 가슴과 성기가 크게 확대된다. 자신의 몸을 누군가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이 ‘노파의 얼굴에 여성의 몸’을 한 퍼포머는 화들짝 놀라며 옷을 주워 입으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퍼포머는 굶주린 동물의 소리를 내며 바닥에 쏟아진 밀가루를 급하게 입 안으로 밀어 넣는다. 모니터에는 이제 관객들의 얼굴이 투영된다.



                
기둥에 묶여 자신에게 맞지 않는 여러 겹의 옷을 입은 채 ‘부름’을 기다리며 평생 동안 늙어온 듯한 이 노인은 일평생 전화벨 소리만 기다린 듯 보인다. 마치 사무엘 바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상케 하는 이 퍼포먼스를 통해 작가 흑표범은 ‘당신이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있는 듯하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표현된 언제 신이 올지 또 그 약속을 지킬지 모르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존재로서의 인간과 작가 흑표범이 연기한 전화벨 소리를 기다리며 누군가로부터의 ‘부름’에 목마른 여인의 몸을 한 노파의 모습은 어딘가 너무 닮아 있다. 이런 점에서 흑표범의 퍼포먼스 ‘부름’은  미디어와 행위를 섞어 만든 ‘21세기 버전 고도를 기다리며’ 쯤으로 불러도 될 듯하다. 20세기 버전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주인공들은 신을 기다렸다면 21세기 버전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주인공은 환영으로 투영된 전화기 이미지를 바라보며 이 환영이 실재처럼 자신과 교감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흑표범이 기다리는 ‘그’는 아마도 신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흑표범은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이 창조해낸 이미지가 자신을 구원해주길 바라는 작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즉 작가 자신의 ‘예술적 또는 미학적 이상’이 언젠가는 자신의 삶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 이상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관객들이 그를 잘 소비해 주어야 한다.




작가는 그렇게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 맹목적으로 몸부림친다. 그러나 결국 ‘그’에게 다가가기 직전 작가는 관객들 앞에서 발가벗겨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는 관객의 시선과 맞부딪치게 된다. 관객들은 아마도 대중 앞에서 발가벗겨진 예술가의 ‘속’을 들여다본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흑표범은 그러나 ‘예술을 소비하는 당신들 역시 그 시스템과 메카니즘에 의해 소비당하고 있다’고 역설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자신의 벌거벗은 몸이 생중계로 무대 위 모티터에 투영되는 동안  이 모니터를 지켜보는 관객을 바라보는 퍼모머의 날카로운 시선과 관객의 시선이 아주 잠깐 동안 교차할 때 절정에 달한다. 아마도 이 순간이 21세기 버전 고도를 기다리며의 노른자이리라.

제 1회 추락천사 페스티벌의 오프닝으로 기획된 흑표범의 퍼포먼스 ‘부름’은 ‘낙선전’의 의미를 적절하게 잘 표현해 냈다. 예술가들이 평생을 바쳐 믿는 ‘그’는 누구일까? 예술가들은 ‘그’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 예술가들은 잠깐이라도 ‘그’를 만나기 위해 무엇을 하는가? 과연 만나기라도 한 것일까? 이런 질문을 줄기차게 하고 있다.



작가 흑표범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 필자는 예술가들이 평생 동안 기다리는 ‘그’는 ‘미학적 완성’이라고 확고하게 말할 수 있다. 프랑스로 망명한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가 “예술가의 고향은 예술사”라고 분명히 말한 것처럼, 예술가에게 미학적 완성이란 자신이 그렇게 속하고 싶었던 망향, ‘예술사’에 속하는 것이다. 즉 이 더럽고 추잡스러운 육신의 고향을 떠나 영원히 꿈꿔오던 ‘예술사로부터 시민권을 얻어내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술가들이 ‘그’를 통해 얻고자 하는 바로 그것이다.




예술사로부터 시민권을 얻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 길에서 예술가들은 낙선의 쓴 맛도 본다. 또 좌절한다. 단맛을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 단맛이 마치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쵸코렛과 사탕으로 만들어진 ‘마녀의 집’처럼 예술가가 가던 길을 잃고 살만 찌워 누군가의 먹이가 되게 할 수도 있다. 예술가의 고향인 예술사가 쵸코렛과 사탕으로 멋들어지게 꾸며진 궁전일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만약 그 궁전을 그가 평생 동안 찾던 바로 그것이라고 믿는다면 그는 쵸코렛과 사탕을 소비하고 또 살찌워진 자신의 육신을 누군가에게 바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낙선예술가들은 아름답다. 이들은 아직 이 성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지나쳐 간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낙선 예술가들은 아직 좌절의 쓴 맛을 보며 예술사로부터 시민권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일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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